2014년 '페미니스트'라고 쓰인 표지판을 배경으로 공연한 비욘세/사진=Bloomberg
2014년 '페미니스트'라고 쓰인 표지판을 배경으로 공연한 비욘세/사진=Bloomberg
“다 겪고 나서 보니 왜 요즘 애들이 여성 혐오니 페미니즘이니 소리를 높여야 하는지 공감하게 돼.”


환갑 나이의 여자 선배의 말은 나에겐 충격이었다. 현역 시절 늘 ‘여성 1호’의 타이틀을 줄줄 달던 사람이었고 그 비결은 “불평하지 마라”는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이십대 나이에도 두 달 출산 휴가 다녀온 뒤 빌빌 대는 나에게 “우리 때는 보름 쯤 쉬고 다 나왔어”라며 늘 ‘하나도 남자들에게 책잡힐 일을 안했다’는 자부심을 늘 강조하던 분이었다.

 

오십 나이의 나도 그런 기준에 맞춰 살아온 것 같다. 뭔지 모를 불쾌한 감정이 드는 말을 들어도 “다 니가 예뻐서 그런 거야”라는 말 한마디면 바보같이 웃어넘겨야 ‘성질머리 더러운 여자’ 소리 덜 듣고 버스 안에서 조는 사이에 허벅지에 올라와 있는 옆 남자의 손에 심장이 내려앉을 것 같으면서도 큰소리 내는 게 싫어서 덜덜 떨고만 있었다.

 

그러면서 요즘 젊은 애들한테 “우리 때는 성희롱이란 말도, 육아휴직이란 말은 존재하지도 않았어”라며 부러움과 자부심이 묘하게 섞인 설교를 늘어놓는다. “직장에서는 그래도 남자들이랑 똑같은 일과 똑같은 대우를 받아”라며 안도했지만 뒤돌아보니 내가 그 직장에서 9년 만에 다시 등장한 여자였고 동료의 성비마저 10:1 이 될까 말까 하던 사실은 아예 인지도 못하고 있었다.

 

우리 때도 페미니즘이란 말은 분명 있었다. 하지만 그건 너무 멀고 어렵고 골치아파보였다. 나같이 게으른 사람이 무임승차하는 요즘의 여성권리나 혐오에 대한 확산된 인식의 시대에서도 별반 다르지 않다.

 

무의식적으로 여성을 비하하는 용어를 내가 농담처럼 쓰고, 그런 노래를 듣고 흥겨워 하고 있는 나를 보며 놀랜다. 특히 최근 여성 대통령의 불법과 부패와 탄핵을 논하는 자리에서 뒤섞여 버린 정의의 목소리와 여성혐오 발언의 속에서 ‘분노를 먼저 말해야 하나 여성 차별적 시선을 먼저 지적해야 하나’의 문제에 명쾌한 답변을 스스로 얻기 어려웠고, 그 때마다 ‘페미니스트’의 조언들을 들으며 하나씩 생각을 교정해나가고 있다.

 

오랜 시간 사회생활을 거치며 내가 달라진 게 있다면 일상 속에서 ‘이건 아니야. 이것만은 바뀌어야해’라는 리스트가 늘어나고 그 필요에 점점 공감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모든 면에서 ‘완벽한 이론과 행동으로 무장’해야 할 것 같은, 그래서 애초에 겁먹고 물러난 페미니즘이란 말을 하나하나씩 거기에 가까이 가고 내가 기댈 수 있는 것으로 바꿔 생각하기로 했다.

논란이 된 엠마왓슨의 베니티 페어 화보/사진=Vanity Fair twitter
논란이 된 엠마왓슨의 베니티 페어 화보/사진=Vanity Fair twitter
얼마 전 활발히 페미니스트 활동을 펼치고 있는 젊은 배우 엠마 왓슨이 ‘베니티 페어’에 상반신을 노출한 표지 모델로 등장하자 “페미니스트라면서 저래서 되냐”는 비난이 쏟아졌다. 페미니스트와 야한 옷차림은 모순되는 걸까. 여성운동의 대부 글로리어 스타이넘은 거친 말로 맞받아친다. “Feminists can wear anything they fucking want.”

 

2014년 MTV 뮤직어워드 시상식에서 ‘페미니스트(FEMINIST)’라는 글귀와 함께 등장한 비욘세 역시 ‘그의 섹시함과 페미니즘이 양립하느냐’며 비평가들의 입에 오르내렸다. 그러나 비욘세는 아랑곳 하지 않고 페미니스트로서의 자신만의 길을 걷고 있다.

 

페미니스트에 정답은 무엇일까. 오답이 될까봐 우리는 페미니즘이란 말을 거부하는 것은 아닐까. 완벽하지 못해, 실수할 것 같아. 모순된 생각을 할 것 같아 페미니스트가 되길 두려워하는 사람들에게 미국의 록산 게이는 이렇게 말한다. “나쁜 페미니스트(Bad Feminist)가 되자.”

 

그가 보는 페미니스트에 대한 현실적인 사회의 시각은 우리와 다르지 않다. “여성이 여성혐오나 강간 유머에 부정적으로 반응하면 ‘예민하다’는 말을 듣거나 ‘페미니스트’딱지가 붙는데 이것은 ‘헛소리를 한마디도 참지 못하는 여성’을 가리키는 용어가 돼버렸다.”(<나쁜 페미니스트> 중)

 

더구나 여성인 그 자신도 모순적이다. 록산 게이는 우리 귀에도 너무나 익숙한 대 히트곡 로빈 시크의 ‘블러드 라인(Blurred Line)’의 ‘I know you want it’이라는 가사가 여성차별적인 것을 뻔히 인식하면서도 그 노래만 들으면 신이 나는 자기를 먼저 언급한다.(한국 여성인 나도 그렇다. 이 노래의 매력적인 멜로디를 거부하기란 정말 힘들다)

 

“나는 분홍을 좋아하고 로맨틱 코미디를 좋아하죠. 남자들이 벌레를 잡아주고 잔디 깎아주고 쓰레기 버려주는 것도 좋아해요. 차에서는 성폭력적인 랩송을 따라 부르고요”(TED 강연)

 

그밖에도 일상에서 자신이 드러내는 수많은 실수와 불완전함을 고백하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른 사람들처럼 나도 모순적인 사람이지만 확실한 건 나는 여성이라는 이유로 개X같은 취급을 당하고 싶지는 않다는 것이다.”

 

필요한 것은 변화와 행동이다. “우리는 살면서 크고 작은 수많은 부당함을 목격하면서 ‘끔찍해’라고 생각하지만 침묵을 지키고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다른 사람들이 알아서 싸움을 해줄 때까지 기다린다.”

블러드 라인의 'I know you want it' 뮤직비디오 장면/사진=유튜브 캡처
블러드 라인의 'I know you want it' 뮤직비디오 장면/사진=유튜브 캡처
그래서 그의 결론은 “나는 나쁜 페미니스트다. 페미니스트가 아예 아닌 것보다는 나쁜 페미니스트가 되는 편이 훨씬 낫다고 믿는다.” (<나쁜 페미니스트>중)

 

“우리의 불완전함을 인정하고 작은 용기를 내어서 하나씩 올바른 방향으로 선택해야만 합니다. 매력적인 멜로디의 노래들이 전부 여자들을 차별하는 노래만 부르지 않도록 하나씩 요구하고, 거부하는 작은 선택이 중요합니다.”(Ted 강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