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I를 이겨본 마지막 인간, 이세돌 9단이 AI와 은퇴 대국 3번기를 시작했다.

이세돌이 상대하는 AI는 NHN에서 만든 '한돌'. 커제를 이겼던 '알파고 마스터'보다는 좀 더 세고, 바둑의 신이라 불리는 '알파고 제로'보다는 조금 약하다는 평가를 받는 인공지능이다. 올해 세계 인공지능 바둑대회에서 한돌은 14개 팀 중 3위에 올랐다.

이번 3번의 대국은 '치수고치기'로 펼쳐지는데, 쉽게 말해 이세돌과 한돌의 실력차가 얼마나 나는지를 점검해 보는 것이다. 이세돌이 승리한 첫번째 경기에서는 이세돌이 한돌에 두 점을 깔고, 대신 한돌에게 7.5집을 준 뒤 시작했다. 

바둑에서 먼저 두는 것의 값어치는 6.5~7.5집 정도. 돌 2개를 먼저 놓는다는 것은 15집 정도를 미리 받는 것과 다름없다. 여기에 한돌에게 7.5집을 주기로 했으니, 최종적으로는 이세돌이 7.5집 정도를 미리 받고 시작한 수준이다.

이세돌의 1국 승리로 2국에서는 어떤 핸디캡도 적용하지 않고 한돌과 맞두게 된다. 만약 이세돌 9단이 2국에서도 승리하면 3국은 한돌이 이세돌에게 두 점을 깔고 7.5집을 준 뒤 두게 된다. 반대로 한돌이 2국에서 이기면, 이세돌은 다시 한돌에게 두 점을 먼저 깐 뒤, 7.5집을 한돌에게 주고 시작하게 된다.

2016년 이세돌과 알파고의 대결이 AI가 '신이라 불리는 인간'보다 한 수 위임을 보여준 것이라면, 한 수 접고 시작하는 이번 은퇴대국은 ‘신의 영역에 들어선 AI’에 도전하며 살아야 하는 인간의 운명을 보여주었다. 바둑이 '예와 도'의 영역에서 ‘기계 계산’의 영역이 됐음을 공식화한 것이다. 

기원전 2300년 전 중국에서 시작된 바둑은 일본 막부시대에 들어 현대바둑으로 발전했고 전문 기사가 생겨났다. 일본의 가문들은 명예를 걸고 바둑으로 싸웠고 기술 이상으로 '예와 도'를 중시했다. 하지만 이런 전통은 더 이상 보기 힘들게 됐다. 그래서 한 시대를 마감하는 인간 바둑의 풍미를 정리해본다.



예와 도가 있었던 인간의 바둑 

① 이겨도 웃지 않는다. 

이세돌은 알파고와의 4국, 이번 한돌과의 1국에서 승리한 후 함박웃음을 지었다. 평소 바둑대회에서는 볼 수 없는 미소였다. 인간들 사이의 바둑에서는 패한 상대를 배려해 이기더라도 자신의 감정을 감춘다.

➁ 하수가 고수를 상대할 때는 도발적인 수를 두지 않는다.

특히 바둑판에 첫 수를 둘 때, 하수(혹은 손아래)는 고수 쪽 앞에 두지 않는다. 얌전히 자신과 가까운 곳에 먼저 돌을 두는 것이 예의이다.  

③ 빨리 두라고 재촉하지 않는다.

각종 대회가 개최되면서 제한시간이 생겼지만 과거의 바둑은 최장 1년 이상 둔 경우도 있었다. 지금도 일본은 주요 대회에서 1박2일 동안 바둑을 둔다. 자신이 생각할 수 있는 최선을 찾아서 한 수 한 수 두어가는 것이 바둑이었다.

이와 함께 가문의 명예를 걸고 싸우는 전쟁이었기 때문에 독특한 육성 제도도 생겨났는데 바로 '내 제자' 제도다. 마치 양아들을 키우듯 아예 스승의 집에서 먹고 자면서 바둑을 배우는 것이다. 제자가 독립하려면 5단 이상의 실력을 인정받거나 성인이 돼야 했다.



한국 바둑사에서 가장 중요한 3명 

한국 바둑의 역사를 정리할 때 가장 중요한 인물로 흔히 3명을 꼽는다. 

조훈현: 한국이 세계 바둑에 중요한 한 축임을 알린 기사
이창호: 우칭위엔(중국)과 더불어 역대 최강으로 꼽히는 기사
이세돌: 이창호와 맞대결에서 호각을 이루며 창의적인 생각으로 세계를 재패했던 천재 기사

조훈현의 기록은 3가지로 압축되는데

  1. 역대 최다 타이틀 기록: 국내외 우승 160회(이창호 140회)
  2. 바둑 올림픽 응씨배 초대 우승: 가장 오랜 역사의 세계 대회. 1988년 1회 대회에 한국인으로 유일하게 참가해 우승했다.
  3. 세계대회 최고령 우승 기록: 2003년 삼성화재배 우승 당시 49세 10개월. 그것도 대회 2연패.

그리고 만 9세에 프로바둑기사가 된 최연소 기록은 지금도 전 세계 바둑사에서 바뀌지 않는 기록이다.

조훈현에서 시작된 세계 속 한국 바둑 

조훈현은 한국에서 최연소로 프로 기사로 데뷔한 뒤 바둑의 메이저리그라 할 수 있는 일본으로 건너갔다. 일본에서 자신의 인생을 바꿀 스승을 만났는데 1930~40년대를 풍미했던 바둑기사 세코에 겐사쿠. 그는 생전에 딱 3명의 제자만 두었다. 일본의 하시모토 우타로, 중국의 우칭위엔 그리고 한국의 조훈현.

세코에 겐사쿠의 제자의 계보만 봐도 바둑 역사의 흐름이 보인다.


세코에 겐사쿠는 중국의 우칭위엔을 키워낸 후 수많은 기사들의 요청에도 불구하고 30년 동안 제자를 받지 않았는데 칠순이 넘은 나이에 마지막으로 받은 제자가 한국의 조훈현이었다.

지도방법도 특이했다. 스승의 집에서 먹고 자면서 배울 뿐 정작 바둑은 직접 가르치지 않았다. 그저 조훈현이 스스로 얼마나 발전했는지 가끔 체크할 뿐이었다.

세고에 선생님은 내가 어디 가서 바둑을 지고 오든 이기고 오든 

칭찬을 하신 적도 야단을 치신 적도 없다. 

너무 어이없게 지고 온 날도, 화끈하게 이겨 의기양양한 날에도, 

나에게 평소처럼 마당을 쓸라느니, 술상을 봐오라느니 하며 잡일을 시키셨다. 

넘쳐흐르는 기쁨도, 찢어질 듯한 아픔도 

그저 일상의 일들과 똑같이 대하도록 마음 수련을 시키신 것이다.

조훈현, <조훈현, 고수의 생각법>

일본에서 프로기사로 활약하던 조훈현은 성인이 된 뒤 병역의무 때문에 어쩔 수 없이 한국으로 돌아와야 했는데 당시 한국은 일본에 비해 바둑 불모지였기에 조훈현을 떠나보낸 그의 스승은 낙담해 목을 매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그는 조훈현이 입대하는 마지막 순간까지도 병역을 미루거나 일본에서 활동할 수 있는 방법이 없는지를 백방으로 알아봤다고 한다.

스승 세고에는 생전에 "내가 한국에는 은혜를 갚지 못해 늘 아쉬웠는데 너를 제자로 받아 은혜를 갚게 됐으니 다행이다"고 말했다고 한다. 

나중에야 그 은혜가 바둑에 대한 은혜라는 것을 알게 됐다. 바둑은 일본이 최강국이지만 중국에서 한국을 거쳐 일본으로 온 것이니 두 나라에 갚아야 할 빚이 있다고 생각하신 것이다. 

선생님이 바둑을 대하는 마음은 그만큼이나 깊었다.

조훈현, <조훈현, 고수의 생각법>

그러나 한국으로 돌아와 병역을 마친 조훈현은 더 강해졌다. 1976년 국내 최고 타이틀인 '국수'전에서 우승하고 1980년에는 국내 모든 대회에서 우승했다.

국내를 평정하고 참여하게 된 대회가 바로 1988년의 응씨배. 이전까지만 해도 '세계바둑=일본바둑'이었다. 중국 출신의 우칭위엔조차도 바둑기사 활동은 일본에서 했다.


바둑 붐을 만든 조훈현  

응씨배는 중국도 세계 바둑계에 당당한 한 축임을 알리고자 개최한 대회였다. 중국 내에서 활동하는 녜웨이핑이라는 기사가 일본 기사와 중국 기사가 붙는 몇몇 대회에서 이기자 잉창치라는 대만의 부자가 세계 바둑 대회를 개최한 것. 중국 일본 한국 대만 미국 호주 기사가 16명 출전했는데 한국은 조훈현 혼자 초청받았다. 구색 맞추기를 위한 들러리였다.

하지만 조훈현은 모두의 예상을 깨고 우칭위엔의 제자 린하이펑을 준결승에서, 중국의 녜웨이핑을 결승에서 누르고 우승했다.

국내에서는 카퍼레이드로 조훈현의 우승을 치하했다. 그리고 동네에는 어린이 바둑교실이 생겨나며 바둑 붐이 시작됐다. 조훈현에서 시작된 한국 바둑의 빠른 발전으로 세계 바둑계에서는 일본-한국-중국 트로이카 시대가 시작됐다.



역대 최고기사를 키워낸 스승 조훈현 

세고에 스승의 ‘내 제자’로 수학한 조훈현은 자신이 세계 최고의 반열에 오르자 일찌감치 내 제자를 들였다. 그의 나이 불과 31살 때였다. 바둑천재라 불리던 이창호가 열 살이 되던 해 자신의 집으로 데려왔고 부인 정미화씨가 어린 창호를 먹이고 씻기고 했다. 지도 스타일도 스승에게 배운 그대로였다. 홀로 공부하도록 두되 가끔씩 체크하는 정도였다.

이창호는 이듬해 프로기사에 합격했다. 이 기록은 조훈현에 이은 역대 최연소 프로기사 2위의 기록이다. 이창호는 13세에 프로대회에서 우승했고 15세 때는 기어코 자신의 스승을 누르고 우승 타이틀을 빼앗아왔다. 이창호가 야금야금 스승의 타이틀을 빼앗아가는 상황에서도 조훈현은 이창호가 아직 5단이 되지 않았단 이유로 제자를 한동안 독립시키지 않았다.

이창호가 독립한 것은 17세가 되던 해. 이미 조훈현이 대부분의 국내 타이틀을 빼앗기고 난 뒤였다.

몇 년 뒤 나는 창호에게 마지막 남은 타이틀까지 빼앗겼다. 

20년 만에 어떤 타이틀도 없는 무관이 됐다. 

이후로 창호의 독재체제가 굳어졌지만 나는 계속 기어 올라가 

도전장 내밀기를 게을리 하지 않았다. 

나는 그저 다시 정상으로 올라갈 수 있다는 게 중요했다. 

적어도 호락호락하게 물러서지는 않음으로써 나 자신을 증명해 보였다는 데 의미가 있었다.

조훈현, <조훈현, 고수의 생각법>



역대 최고령 세계대회 우승

국내에서는 제자에게 밀려 타이틀을 대부분 잃었지만 그는 당시 3개밖에 없었던 세계 대회에서 모두 우승하며 첫 그랜드슬램을 달성했다. 그가 전무후무한 기록을 남긴 것은 마흔을 넘긴 뒤였다. 현대 바둑대회에서는 제한시간이 적어 나이 많은 기사가 성적을 내기 어렵다. 그만큼 빠르고 정확하게 계산해야 하는데 어린 기사를 따라가지 못한다.

그런데 조훈현은 48세의 나이에 세계대회 2관왕, 49세에는 메이저 대회인 삼성화재배 2연패를 달성했다. 유명한 '골초'로 알려졌던 그가 담배도 끊고 노력한 결과였다.

그는 세계대회 결승에 11차례 올라 9번을 우승했다. 단 두 차례 준우승 때도 한국 기사인 유창혁에게만 졌는데, 외국 기사에게 단 한 번도 결승에서 지지 않은 승부사였다.


인간의 바둑을 떠나보내는 씁쓸함 

이렇게 인간시대의 바둑은 가문의 명예를 건 전쟁이었고, 인생을 바친 '장인'들의 예술작품이었고, 한중일 3국의 자존심을 건 스포츠였다. '목숨 걸고 둔다'던 조치훈 9단은 차에 치여 전치 3개월 교통사고를 당하고도 휠체어에 앉아 1박2일짜리 대국을 6판이나 뒀다.

시대가 바뀌었고 이제는 바둑을 전쟁처럼 생각하지도, 목숨 걸고 두지도 않는다. 세고에 겐사쿠-조훈현-이창호로 이어지는 내 제자 관행도 더 이상은 없다.

지금 바둑 키즈들은 AI에게 배운다. 세계 챔피언도, 사람이 두지 못하는 새로운 수를 두는 것도 AI다. 바둑을 잘 두기 전에 사람이 먼저 되라고 가르쳤던 스승 세고에, 자신이 보유한 국내 타이틀을 제자에게 모두 빼앗기면서도 먹이고 보살펴가며 가르쳤던 조훈현.

그리고 좋은 기보를 남기기 위해 몇 시간이고 며칠이고 한 판의 바둑을 한 수 한 수 채워갔던 수많은 바둑 고수들. 바둑은 단순한 게임이 아니었기에 당대의 바둑고수를 국수(國手), 기성(碁聖)이라 부르며 존중하고 존경해왔다.


알파고 제로는 인간이 3천 년간 두어왔던 바둑 기보를 하나도 보지 않고 490만 번 셀프대국을 하면서 바둑을 스스로 깨우치고 3일 만에 인간의 경지를 넘어섰다.

인간의 바둑을 보며 공부한 알파고 리(이세돌과 대결한 버전), 알파고 리를 더 발전시킨 알파고 마스터(커제를 이긴 버전), 이런 알파고 마스터마저 어린애 다루듯 한 알파고 제로가 그저 독학으로 바둑의 신이 되었다는 것이 못내 씁쓸한 이유다.

바둑을 어떤 식으로 놓는다는 것은 세상을 어떤 식으로 살아가겠다는 나만의 선언이다. 

바둑이 무려 4천 년을 살아남았고 아직도 건재한 이유는 단순한 게임이 아니라 

그속에서 인생관과 삶의 철학을 읽을 수 있기 때문이다.

조훈현, <조훈현, 고수의 생각법>